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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옥씨 삼강정려(宜寧玉氏 三綱旌閭)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고교리 석우촌

건립연도 : 조선말기

배향인물 : 교리공파/ 충신 옥 경련(景鍊), 효자 석현(碩鉉), 효자 재서(在瑞), 열부 평산신씨(平山申氏)

삼강정려
삼강정려(三綱旌閭)는 한 집안에서 충신, 효자, 효부(열부)의 세분이 나왔을 때 조정에서 세워주는 정문(旌門)으로, 의령옥씨 삼강정려는 교리공파 정읍종중인 소성면 고교리 석우촌에 세워져 있다.

효자 승지공(承旨公) 휘 석현(18세, 碩鉉), 그의  아들 효자 승지공 휘 재서 (19세, 在瑞), 휘 재서의 처 열부 숙부인 평산신씨(申氏), 손자 충신 병조참판 휘 경련(20세, 景鍊, 1829~1898)에게 고종27년(1892년)에 석물(石物), 조형(造形), 각(閣)을 하사 받아 세워졌다. 신도비는 23세 종손 옥치원의 사재로 1962년 9월에 세우고 무안 박기청이 비문을 썼다. 각지의 후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참배하고, 선대의 유훈을 이어나가며 추모하고 있다.

승지공(承旨公) 휘 석현(碩鉉, 1776 ~ 1836)은 응계선생 고(沽)의 후손으로 자는 대여(大汝), 호는 송암(松庵)이며 학문에 힘써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公은 병환 중에 계신 아버지가 생선구이를 찾으시니 얼어붙은 강변에 나가 소원하며 애통하게 울고 있었는데 별안간 잉어가 튀어나와 이로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고, 또한 어머니의 병환이 깊었는데 의원은 산삼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다하니 산에 들어가 정성으로 제(祭)를 올리니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산삼을 구하여 효험을 보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의 시묘살이는 물론 선대를 받드는 정성이 극진하였다. 公은 1887년(고종 24년) 사헌부 감찰에 증직되었고 1891년에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어 정려가 내려졌다.

승지공의 아들 휘 재서(在瑞, 1812 ~ 1890)는 일찍이 학업에 힘써 경서에 능하였으며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안에 흘러 넣고 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피며 지성으로 약을 대려 치료하니 하늘이 감동하여 쾌유하였다.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증직되었다.

숙부인 평산신씨(申氏, 1807 ~ 1884)는 휘  재서의  처로 남편의 병환이 깊어지자 지성을 다하였으나 백약이 효과가 없어 심지어 자신의 살을 떼어 병을 다스리며 하늘에 빌며 대신 죽기를 원했으나 무상하게도 천운이 다하였음인지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운명하자  애통한 마음에 피를 토하듯 울다 기절하였는데 비몽사몽에 하늘을 날던 두 용(龍)이 지상에 내려와 사람으로 변하였고 비단옷과 구슬 띠를 두른 채 선영과 묘당에 절하는것을 보면서 의식을 차렸다. 3년상을 마치고 23세의 젊은 나이에 농사짓던 소를 팔아 책을 사고 가업을 지탱하였다.  근면과 교육의 열정이 헛되지 않아 삼종숙 월강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됨으로써 영특한 두 아들은 충효를 겸전하였으며, 학문에 심취하여 성리학과 경사에 정통하였다.

 병조참판 휘 경련(景鍊, 1829 ~ 1898)은  고종3년(1868년) 문과에 급제 하여 남원도호부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사헌부 장령, 집의, 승정원 동부승지, 병조참의 겸 부호군,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국정의 작폐를 일삼는 외척을 제거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 들이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