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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서원(默溪書院)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35-1

건립연도 : 1687년(숙종 13)

문화재지정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

배향인물 : 응계 옥 고(玉 沽), 보백당 김계행(金係行)

향사 : 8월 5일(음력)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 묵계서원
조선초 태종 세종조에 걸쳐 대구현령(縣令). 안동통판(通判). 예조정랑(正郞)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일찍이 야은(冶隱) 길재(吉再)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성균관 교수 시 사도(師道)를 엄정히 하여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같은 어진 선비들을 배출한 응계(凝溪) 옥 고(玉 沽)선생과 성종 연산조에서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등 삼사(三司)의 요직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청백으로 추앙받는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선생 두 분의 청렴. 충절 정신을 현창(顯彰)코져 1687년(숙종 13년)에 서원을 건립하고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1706년(숙종 32년)에 청덕사(淸德祠)를 건립하여  두분을 배향하였다.

1869년(고종 6년)에 서원철거령에 따라 훼철(毁撤)되었으나 1909년(융희 3년) 8월 초5일에 복설령(復設令)을 받고 1925년 강당과 누각, 외삼문등 일부 건물을 중건했으며, 199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두 분을 다시 제향하게 되었다.

 

응계 옥 고 선생

1382년(우왕 8)~1434년(세종 16).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자는 대수(待售이고, 호는 응계(凝溪)이며, 품계는 봉정대부(奉正大夫)이시다. 우왕 임술년(1382년)에 진주목 반성현 남산리5에서 태어 나셨다. 조부는 옥안덕(玉安德)이고, 부친은 옥사미(玉斯美)이다. 
어릴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이 어머니와 군위현 양곡(군위군 내량리)으로 이주하여 야은 길재선생의 문하에서 경학과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생원시를 거쳐 18세에 정종 기묘년(1399년)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1위로 급제하셨다.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교수에 임하며 박팽년·성삼문 등을 제자로 두었다. 이어 사간원정언, 대구현령, 안동부통판을 하였으며, 이후 세종조에서 집현전교리, 예조정랑으로 황해도 찰방으로 파견되었고, 봉상시소윤, 사헌부장령을 하였다.대구현령으로는 <목민심서 이전6조>에 속리의 명환으로 소개되었고, 고을 사람들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평하고 청렴하니 온 고을이 편안했다. 5년 동안 베푼 선정 백세토록 잊을손가.> (一心公淸四境安康五載爲政百世難忘) 라는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세종조에서 청백리에 선정되어 후손이 고손까지 관직음덕을 입었다. 갑인년(1434년) 6월1일 향년53세에 병환으로 별세하셨다. 세종께서 특별히 관과 쌀, 콩을 아울려 10석을 내려 주었다. 돌아가시기에 앞서 와병 중일때는 의원을 보내 치료케 하였다. (세종실록64권. 세종16년 6월1일) 대구현과 안동부에 명환으로 알려져 안동지역 유생들과 후손들이 묵계서원 청덕사에 배향하고 있다. 묘소는 군위현 북쪽 어량곡 을좌에 있다. 정언을 지낸 창설재 권두경이 묘갈명을 지었고, 경옥 이보가 행장을, 밀암 이재가 행장추서와 묘지명을, 평원 이광정이 유허비음기를 지었고, 칠탄 김세흠이 묵계서원 봉안문을, 구주 김세호가 묵계서원 상향축문을 지었다.
배 영인 노씨는 개성소윤 노중개의 따님으로 슬하에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전해지지 않는다.
배 영인 김씨는 봉정대부 사재부정으로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김보광의 따님으로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기일은 7월25일이며, 묘소는 좌측에 있다.
공이 남긴글은 <대구동헌중수운(大丘東軒重修韻)><인심선악상반지도(人心善惡相反之圖)><음양변역성괘지도(陰陽變易成卦之圖)>의 3편뿐이다. 나머지는 동시대인이나 후세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대구현령이나 안동부판관으로 있을 때 보인 뛰어난 치적과 군민들로부터 받은 존경이나 청백리로서의 면모 등에 대한 유사.봉안문.제문 등이다. <음양변이성괘지도>는 길재선생의 문하생으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나타내는 글로 원도에 대한 해설이 돋보인다.